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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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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7-25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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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亨根,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 귀국意向, 정권이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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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좌빨박멸
 조회 : 567  추천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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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亨根,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 귀국意向, 정권이 막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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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국회 인사청문회 속기록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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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20일에 열린 제17代 국회 제262회 제5차 정보위원회에서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金萬福씨 인사 청문회가 열렸다. 한나라당 鄭亨根 의원은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이 한국行을 원하고 있는데 이를 정부측에서 막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鄭亨根: 후보자는 83년 10월 아웅산 폭탄테러 공작원으로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북한 공작원 강민철이 수감 중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金萬福: 예, 알고 있습니다. 정형근: 본 위원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강민철이 한국의 관계기관에 轉向의사를 표시했으며 한국으로의 송환을 원하고 있다고 하는데, 알고 있습니까? 김만복: 듣고 있습니다. 정형근: 듣고 있습니까? 김만복: 예. 정형근: 국정원은 아웅산 테러사건 이후 면회 등 강민철과 접촉한 내용 및 시기에 대해 외교상 밝힐 수 없다고 하여 접촉한 사실을 말을 하지는 않고 있는데 접촉한 것은 사실이지요, 밝힐 수 없습니까? 김만복: 아닙니다. 접촉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형근: 강민철과 접촉한 일이 없다고요? 김만복: 예. 정형근: 그것 자신할 수 있습니까? 위증죄 됩니다. 김만복: 확인해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정형근: 확실히 없습니까? 김만복: 그것을 제가 보고받은 일이 없습니다. 정형근: 아니, 본인이 모릅니까? 보고받은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김만복: 지금 대답은 ‘모른다’고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정형근: 아니, 밝힐 수 없다는 것하고는 다르지요. 면회를 했어요. 면회를 했는데, 지금 오려고 그러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김만복: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은, 북한은 남쪽이 했다라고 그렇게 주장을 해 오고 있습니다. 정형근: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김만복: 그러니까 그 주동자를 남쪽이 데리고 오면 ‘봐라, 너희들이 시킨 사람 이제 너희들이 너희 나라로 데리고 가지 않았느냐’라고 북한이 선전에 이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형근: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조사를 갖다가 수년을 해 가지고 斷交까지 한 사례인데, 그것을 안 데려온다면 말이 안 되고요. 그렇다면 왜 KAL기는 과거사에 넣고 이것은 과거사에 넣지 않습니까? 김만복: 과거사는 제기를 해야 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히…… 정형근: 내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아웅산 테러사건에 관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처리한 것은 앞으로 정말로 과거사에서 조사 대상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책임져야 됩니다. 본인이 오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렇게 본인이 한국에 와서 살고,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는데도 여러분이 북한 눈치 보고 지금 막고 있는 겁니다. 김만복: 이해관계인이 제기를 해 주면 98개에서 99개로 그 사건을 조사하는 데 넣도록 하겠습니다. /////////////////////////////////////////////////// 아웅산 사건 犯人 3人의 運命 -한 명은 사살되고 두 사람은 생포되어 한 명은 처형, 다른 한 명은 복역중 한국에 갈 의향을 비쳤으나... 아웅산 테러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허락을 받아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 8군단 소속 특공부대 강창수 소장에게 지령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강창수는 6.25 남침 때 戰死한 강건 장군의 아들. 폭파임무를 맡은 3人1組의 組長은 진모 소좌(생포 후 사형), 組員은 강민철(최근 옥사), 신기철(체포과정에서 사살됨) 상위였다. 세 사람을 태운 배 愛國동건호는 1983년 9월9일 밤 황해도 옹진항을 출항, 8일만인 9월17일 오후 미얀마 랭군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내린 세 공작원은 駐 미얀마 북한 대사관 전창휘 참사관의 집에 도착하였다. 세 사람은 이곳에서 2주일간 머물면서 테러 실행 계획을 세웠다. 폭약과 조종장치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정보기관은 애국동건호가 입항,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미리 탐지, 본부에 보고하였다. 盧信永 안기부장은 全斗煥 대통령에게 미얀마 방문 취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6일 테러범들은 숙소를 나와 전 참사관의 안내를 받으면서 아웅산 묘소를 정찰하였다. 다음날 새벽 세 사람은 全斗煥 대통령 일행이 참배할 아웅산 묘소 건물의 천장에 폭발물(폭탄 3개)을 설치하였다. 강민철과 신기철이 천장으로 올라가 설치하는 사이에 진모는 밑에서 망을 보았다. 이 폭탄들은 1~2KM 이내에서 원격조종으로 터지도록 했으며 유효 살상 범위는 80m 내였다. 세 사람은 이틀간 묘소 주변 숲속에서 잤다. 10월9일 오전 범행에 성공한 세 사람은 항구로 탈출, 북한 선박편으로 귀환하기로 하고 흩어졌다. 組場 진모는 10월10일 저녁 강을 헤엄쳐 바다로 향하다가 주민들에게 발각되었다. 주민들이 포위망을 압축해오자 수류탄을 터뜨렸다. 그를 건져냈더니 살아 있었다. 강민철과 신기철은 11일 어선에 편승, 항구로 가려다가 수상하게 여긴 어부들의 신고로 경찰관들에게 연행되었다. 경찰이 초소로 끌고 온 두 사람을 수색하려 하자 두 사람은 수류탄을 던지고 응사하면서 탈출하였다. 신기철은 경비병에 의하여 현장에서 사살되고 강민철은 도망쳤다가 다음날인 12일 군인들에게 붙들리기 전에 수류탄을 터뜨렸다. 왼쪽 팔뚝이 날아갔으나 목숨을 건졌다. 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하였고 진모는 거부하였다. 두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진모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강민철은 협조한 점이 참작되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강민철은 복역중 한국측 인사를 만나 "한국에 귀국하여 살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 강민철이 몇달 전에 사망하였다. //////////////////////////////////////////////////// 아웅산 사건 발생 30분만에 범인을 지목한 全斗煥 -군대 안 간 대통령은 수많은 증거 속에서도 두 달만에 범인을 特定하였다. 다음 대통령은 安保 전문가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1983년 10월9일 오전 10시30분쯤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랭군의 아웅산 묘소에서 한국 외교 사절단은 全斗煥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全 대통령은 안내를 맡은 미얀마 외무장관이 숙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3분 늦게 묘소로 출발하였다. 駐 미얀마 한국 대사 이계철씨가 탄 벤츠車가 태극기를 휘날리며 앞서 달렸다. 이 차에 대통령이 탔다고 오인한 것은 길가에서 이를 지켜보던 북한공작원 세 명이었다. 대사 차가 지나가고 조금 있다가 나팔소리가 묘소에서 울려 퍼졌다. 북한 공작원은 참배가 시작되었다고 誤判, 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한국 정부의 장차관급 엘리트 관료 및 취재기자 등 17명이 죽었다. 오전 11시쯤 우산우 미얀마 대통령이 全斗煥 대통령의 숙소로 달려왔다. 全 대통령은 범행을 북한소행으로 단정하였다. 대화록에 의하면 이렇다. "이 테러행위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하고도 집요한 파괴공작의 일환이며 한국, 버바 두 나라의 관계를 갈라놓으려는 폭력사태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취지가 버마(당시 國名) 정부가 발표할 성명서에 포함되기를 바랍니다." 우 대통령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자 全 대통령은 자신의 心證을 재차 강조하였다. "북한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전복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IPU(국제의원연맹)를 집요하게 반대하면서 오늘과 같은 수법으로 테러를 자행하였습니다." 오후 3시경 미얀마 군부의 실력자 네윈 의장이 사죄차 방문하였다. 네윈 대통령은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 정보국에서 숙청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경호에 차질이 있었습니다. 책임자가 제대로 체크를 못한 듯합니다. 사건은 내부 소행일 수도 있고 외부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全 대통령은 네윈 의장에게도 북한소행이라고 강조하였다. "수사에 참고되는 말을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남북 대치 상황은 의장께서 이해하시기 어려울 만큼 긴장이 고조돼 있습니다. 북한은 서울에서 개최키로 된 IPU 총회에 대해 온갖 방해공작을 펴 왔습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총회 개최 10일 전에 대구 美 문화원 폭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수법이 오늘 사건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 점에 유의하십시오. 우리는 그때 사건도 북한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네윈 의장은 오히려 미얀마 내부 사정에 의한 암살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는 발언을 하였다. "우리는 범죄자를 꼭 잡아낼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복잡한 파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날 오후 서울에서 긴급 소집된 임시 국무회의는 物證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천인공노할 북괴의 국제테러 집단으로서의 본성을 다시 한번 똑똑히 알았다>고 했다. 한편 북한 공작원 3명은 범행 직후 탈출을 기도하다가 신고망에 걸려 들었다. 그들은 범행 다음날인 10일과 12일에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미얀마 경찰에 검거되는 과정에서 自爆, 응사를 하다가 組長인 진모와 組員 강민철이 생포되고 조원 신기철은 사살되었다. 全斗煥 대통령이 자신의 感에 의존하여 단정한 것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대구문화원 폭파 사건에 대한 수사보고를 받고 사용한 폭발물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가 아웅산 테러의 상황과 연결시켜 범인을 적중시킨 예언을 한 셈이다. 全斗煥 장군은 1사단장일 때 제3 땅굴을 발견하였다. 오직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워 대통령이 되었던 李明博씨는 천안함 爆沈의 범인이 김정일이라고 단정하는 데 두 달이 걸렸다. 軍人 출신 대통령은 아무런 증거가 없는 가운데서 30분만에, 군대 안 간 대통령은 수많은 증거 속에서도 두 달만에 범인을 特定하였다. 다음 대통령은 安保 전문가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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