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풀리지 않았던 두 가지 의문
(첫번째 의문)
1980년 나는 대학 3학년이었다. 그것도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으로서 소위 늙은 대학생이었다. 공부보다는 문학에 취하고 동기들과 몰려다니며 술에 취해 살던 시절이었다. 그리고는 학도호국단 간부 선거에 3학년 자격으로 참가하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1980년 봄은 데모로 시작되고 있었다. 지도교수를 어용으로 몰기도 하고 ‘총장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날을 새우기도 하였다. 무엇을 정확히 알고 하는 데모라기보다는 몰려다니니 재미가 있고, 밤새워 교실에서 날을 새우는 새로운 분위기에 낭만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학도호국단 소속 간부들이었다.
정치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가 잡고 있을 때였다. 전두환의 12.12 사태는 분명 군부 통치의 연장선상이었다. 아무래도 이에 대한 전면적인 국민의 저항이 필요하던 때였다. 야당은 분명 국민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당시 야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지휘하고 있었다.
후일 밝혀진 내용이지만, 호남에서의 학생 데모는 김대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학생회장 이하 몇 인물들이 김대중을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 후 데모는 교내를 벗어나 정치색을 띠며, 도청 앞 분수대로 옮겨갔다. 구호는 ‘민주 회복’과 ‘전두환 물러가라’였다.
당시 서울은 시내버스가 불태워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광주는 촛불뿐이었다. 데모는 그렇게 평화로웠다. 그 무렵 나는 어머니 농사를 도와주러 시골에 있었다. 5월 16일 후배로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전화가 왔다.
그 길로 광주로 갔다. 그러나 버스터미널은 이미 살육의 현장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이었다. 군대를 금방 다녀온 나는 그 군인들이 얼마나 강한 전투력으로 무장된 자들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곤봉을 맞은 학생 몇이 터미널 벽에 기대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피는 머리에서부터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어느 공수부대원은 팬티 차림으로 도망가는 학생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그날 버스터미널 화장실에서 최초의 희생자가 나왔다.
학생가방을 들고 있던 나는 터미널 곁 아시아극장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양쪽이 포위되어 있었고, 최루가스는 자욱하였다. 그때 양동 사는 동명이 엄마라는 분의 도움으로 부부행세를 하면서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가는 동안 보았던 참혹한 장면,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잔혹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었다. 대학 앞 하숙집을 뒤지는 통에 우리는 지붕에서 밤을 맞았다.
며칠 후 나를 비롯한 후배들은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가 현장에 없었지만, 나는 아웃사이더로서 냉정하게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가지 의문을 아직까지 품고 있었다.
1. 그 많은 무기고가 어떻게 한꺼번에 털릴 수가 있는가. 시민군의 무장을 위해 무기고가 털린다는 것은 이것은 정상적인 시민들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엄중하게 지켜지는 무기고가 그것도 한꺼번에 털릴 수가 없다. 사전에 무기고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아는 자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군 장갑차가 아세아 자동차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극비에 속한다. 어떻게 이를 알고 탈취하였으며, 그리고 이들 장갑차를 운행할 수가 있는가. 숙련된 군 기갑병 아니면 몰 수 없는 장갑차를 시민들이 몰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정재학
(반국가교육척결 국민연합 사무총장,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wps논설위원, ptimes논설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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